ㅅㅁ

팬티와 집문서

호두네ㅅㅁ 2024. 1. 4. 18:21

대각선 자리에 앉은 아저씨

지난해 5월 말일 새벽 6시경 긴급 대피 재난 안내 문자가 서울 시민을 깨웠다. 경계경보 발령으로 대피를 준비하라는 내용의 안내 문자였다. 그 당시 나는 한살림 서부센터에서 새벽 알바를 하고 있었다. 일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라서 대파를 나누며 대충 갈무리를 하고 있다가 놀라서 창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창고 밖 차량에서 담배 피우던 배송기사 아저씨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계속 불을 댕기며 헐레벌떡 튀어나온 나를 놀렸다. 집에 혼자 있는 짝꿍이 걱정되어서 전화를 했는데, 평소에 잘 놀라기로 (나에게) 유명한 그는 역시나 놀라서 '어떻게 된 일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동네 할머니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호두가 없어서 다행이라든지' 하며 이것저것의 안부를 물어보았다. 내 주변에 정신없는 사람이 있으면 도리어 냉정해지기로 (짝꿍에게) 유명한 나는 진정하라고, 일단 '경계경보'이고 나도 일이 거의 다 끝났으니 집에 가겠다고 하였다. 짝꿍은 너무 놀라서 계속 '팬티랑 집문서, 팬티랑 집문서를 챙겨야 해' 하며 팬티와 집문서에 사로잡혀 있다고 나에게 말했다. "팬티랑 집문서?" 우리 둘은 그게 너무 웃겨서 깔깔대며 서로 진정을 하였다. 오보였다는 안내 문자가 다시 와서 나는 일을 제시간까지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왜 하필 '팬티와 집문서'였는지 그녀도 나도 아직 이해 못하고 있으나, 둘 다 전쟁이 나면 당장에는 하등 쓸모없는 것 들임에 분명하다. 우리는 대체로 서로에게 그런 포지션이다. 당장의 문제는 내가, 나중의 문제는 짝꿍이 걱정하고 해결한다.

 

23년 계획했던 모든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12월에 딴 마지막 자격증은 국가 자격증은 아니지만 소방 안전원 주관으로 진행하는 열흘간의 집체교육 후 시험을 통과하면 취득할 수 있는 자격증이었다. 시험이 산업기사 급의 어려운 문제들 이어서 100명의 교육 인원들 중 80% 이상을 차지하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형님(?)들의 그 어떤 얼굴들이 기억에 남는다. 그 생기 없는 호탕함. 세기말적 마른 유모아. 솔직함이란 1도 없는 천진성.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으나 내가 관심의 틈을 1mm만 열어 놓으면 비집고 들어와서 나에게 자신의 지식을 알려 주려(가르치려) 들었다. 부탁하지 않은 호의에 걸맞은 무색의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던 마지막 날. 내 대각선 앞자리에 있던 비장한 아저씨의 합격 소식을 보기 위해, 내 합격 여부는 이미 확인했지만 조금 더 자리에 남아있었다. 역시 그 아저씨는 합격이었다. 겸허히 합격을 받아들이고 바로 취업의 전장으로 뛰어들 것 같은 그 아저씨는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계셨을까.

 

집에 돌아와 짝꿍과 함께 모종의 승리를 만끽하였다. 짝꿍이 너나 나나 내년은 잘 될 것 같다고 말해 주었다. 정말 그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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