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승순

특정 정당과 정치인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긴 글

산승순 2024. 1. 16. 21:00

 대학생이 되면서부터 특정한 정치적 방향성과 정당에 대한 지지의 요구를 많이 받았다. 그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올바른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하며 지냈고, 그때는 좀 더 적극적인 사회변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내가 속한 동아리는 운동권과 맥락을 같이 했고, 자연스럽게 선배들도 모두 그런 성향이었다. 그렇지만 본래의 정체성은 가톨릭 동아리였기에 그러한 성향과 별개로 생활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단 한 번도 특정한 정당의 본격적인 지지세력이 되거나 정치인을 마음먹고 응원한 적이 없다. 나의 생각과 기준에 따라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했을 뿐이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나는 특정한 정당이나 정치인에 대한 지지를 해야 한다는 요구를 종종 받는 것을 넘어 심지어 비겁한 행위라며 비난도 여러 번 받았다. 하지만 그런 의견도 별개로 지금도 나는 정당이나 정치인을 지지할 생각이 전혀 없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거다. 당연히 선거에도 모두 참여했다.

 나를 '비겁한 사람'이라며 비난하는 사람은 어떠한 의도와 확신으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그 사람들이 말하는 '비겁'이란 자신과 같은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봄과 동시에 중간자적 위치에서 특정한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을 현실에서 도피해 '올바른 사회'를 이룩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는 사람을 표현하는 단어에 가깝다. 즉, 정당 혹은 정치인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을 의견이 없는 사람, 또는 제대로 된 의견을 가지지 못해 정보가 부족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얼마나 큰 자기 확신을 가지면 타인을 '비겁하다'라며 비난할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저 말을 할 수 있는 조건은 첫째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전혀 존중하지 않아야 하며, 둘째로 자신이 가진 의견이 반드시 세상에 이롭기 때문에 그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세상을 해하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인식해야 하고, 셋째로 연대를 해 힘을 하나로 합쳐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주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엄청난 확신을 가져야만 한다. 그 의견에 따르면 어차피 정치는 정당과 정당의 싸움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정책을 이끌어 내는 것이기 때문에 특정한 정당의 편을 들어야만 한다. 나라고 그런 방침과 사고를 모르는 건 아니다. 나는 본과가 행정학과다. 사회복지학과는 복수 전공이다. 정치와 정치의 구성, 정부와 행정의 기본에 대한 건 익히 알고 있다.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나 또한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고민을 계속 해오고 있기 때문에 정치는 중요한 관심사 중 하나다.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기본적으로 연대의식에서 생겨난다. 연대라는 건 정치적 의도를 가진 정치 행위이며,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약자인 집단이 목적성을 가진 행위를 통해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득을 가지고 오기 위해 발현되는 행위다. 나의 희생을 통해 타자를 이롭게 하는 희생 행위라 볼 수 없고, 정의를 집행하기 위한 행위라 볼 수도 없다. 거기에 속한 '정의'는 어디까지나 '내가 생각하는 정의'이고, '내가 원하는 올바른 사회'가 될 수는 있으나, 모두를 위한 선택이라 정당화할 수는 없다. 사회적 정의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사회적 정의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약자를 위한 작은 것들의 신이 있어야 하고, 작은 것들을 위한 정부와 정책이 있어야 한다. 소외계층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일정한 자본을 쌓을 수 있어야 하고, 누구나 인간이 원하는 욕망을 달성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타자에 진심으로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현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수의 의견을 가진 사람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그래서 연대를 통해 집단을 구성하고, 진정 소외된 약자가 인권과 기본적인 욕망을 해소할 수 있기 위해 투쟁한다. 신경질적으로 굴어야 그나마 말을 들어주는 게 인간의 당연한 마음이다. 타자가 되지 못하는 인간은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졌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연대'는 분명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 정치 행위다. 내가 달성하고 싶은 바람과 열망을 이루기 위해 내 몸을 움직여 세상에 의견을 전달하는 과정인 것이다. 사회적 정의를 이루기 위한 행위라 하더라도 그 본래의 목적은 달라지지 않는다. 나의 행위가 목적적으로 이롭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내가 하는 행위가 사회적 정의에 가깝다고 스스로 생각할 뿐이다. 연대를 이룬다는 게 고결하고 고귀한 희생적인 정의를 이루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내가 하는 연대 행위가 사회적 정의라 생각할수록 사람은 선민의식에 빠진다. 그래서 타자를 '비겁하다.' 혹은 '올바르지 못하다.'라고 비난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세상의 정의를 이루기 위한 고귀한 행위를 하고 있으며, 너희들은 나와 달리 아는 게 없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위해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겠다. 그러니 너희들은 내 말을 듣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보다 더 자아도취적인 사고가 있을 수 있을까.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착각 중 하나가 정당 정치적 목적을 가진 연대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이다. 이 경우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모두가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한 정의를 행하고 있다. 내가 틀린 의견을 가졌다고 인정하는 정당 정치적 연대자는 어디에도 없다. 모두가 당당하고 모두가 타인을 비난하며, 모두가 사회 정의를 이룩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물리적인 사회의 소수자를 위한 연대는 정치적 목적을 가졌지만 해당 집단을 위한 투쟁은 틀리지 않았다. 아니, 기본적으로 정치적 목적을 가졌다는 게 집단을 비난하는 말이 아니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자원의 분배와 사회적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사회 발전을 이루기 위한 장치이며,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에 따른 민주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자원의 분배가 불공정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가지고 있어 정치적 목적을 가진 행위를 통해 소수자가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에 따른 정치적 행위는 당연히 이루어져야 함이 분명할 뿐 아니라 권장되어야 한다. 다만 그게 자기희생적인 고귀하고 고결한 행위가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당정치로 흘러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소수자의 권리를 달성하기 위한 정당이라면 존재 자체가 소수자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기 때문에 '사회적 정의를 이룩하기 위한 정치적 연대'와 같은 역할을 하겠지만 (사실 그런 정당이 제대로 돌아가는 걸 본 적이 없다. 인간은 욕망의 산물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자본과 권력이 주어지면 자신을 위해 사용하기 마련이다.) 일반적인 정당 정치는 보편적인 시민 다수의 욕망에 적합한 정책을 만들어 내기 위해 행해진다. 하지만 지지자가 정당과 연대의식을 가진 채 정당의 정책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정당 혹은 정치인을 자신과 동일시해버리면 정당은 지지자를 바라볼 필요가 없어진다. 정당의 존재가 연대 자체가 되고, 정당 혹은 정치인의 색 자체가 지지자의 색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팬이라는 게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정치인이 시민의 눈치를 보고 정책을 펼치는 이유는 투표권을 가지고 있고, 감시자의 역할을 하며, 정치인으로서의 생명을 끝낼 수 있는 권한이 시민에게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정치인이라 할지라도 선거에 두 번 이상 패배하면 존재의 근간이 흔들리기 마련이다. 정당, 그리고 정치인을 지지하는 세력이 있을수록 해당 정당과 정치인은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지 않고, 올바른 정책을 펼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 정치인이 괜찮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정치인의 주변인들이 정책을 구성하고 행정을 행하기 때문이다. 정당과 정치인의 무조건적인 지지는 본인이 바라는 세상을 달성할 수 없게 만든다.

 요즘에는 '정당의 정체성을 근간으로 하는 연대'를 넘어, '해당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근간으로 하는 연대'가 대세를 이룬다. 그들은 하나의 커뮤니티에 속해 커뮤니티의 대세 의견을 자신의 의견이라 착각한다. 그리고 커뮤니티의 의견이 바람직하다는 논리적 함정에 빠져 자신이 하는 '정당 정치의 지지를 위한 연대' 행위가 사회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가장 가까운 일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특정한 소수자에게 고통을 주거나 불합리하게 하는 일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 희생은 작은 것, 혹은 어쩔 수 없는 것에 불과하며 자신들이 하는 행위는 사회적 정의의 달성을 이루기 위한 행위이기 때문에 정당성을 부여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소름 끼치는 선민의식을 가진다. 전에도 말했지만 자신, 그리고 자신이 속한 집단이 정의를 이루기 위한 목적을 가졌다는 말이 가장 위험하고 교만하다.

 정당에서 한 발을 떼어 놓고 정치를 바라보아야 진정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름에 가까운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어차피 이거 아니면 저거를 선택할 게 분명하다는 인식을 정당정치를 하는 이들에게 주어서는 안된다. 그러한 구조 안에서 그들은 더 이상 사람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권력을 위해 노력한다. 사람이란 그렇게 되어 있다. 안심하는 순간 그 모든 달성을 자신이 이루었다고 착각하며, 타자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게 된다. 비단 정치인 뿐 아니라, 유력한 자리에 오르면 진심 어린 충언을 해주는 사람은 주변에 없다. 모두 나의 팬, 혹은 나의 팬인 척 나의 권력에 함께 탑승한 사람뿐이다. 그 안에서 정신을 차리려면 팬이 아닌 사람들이 곳곳에 있어야만 한다. 나는 정당과 정치인을 지지할 생각이 없다. 과거에도 없고 지금도 없다. 고로 앞으로도 없다.

'산승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시와 처벌, 지원과 지지  (1) 2024.03.16
아빠가,  (0) 2024.01.28
개신교와 가톨릭에 대하여 (1)  (0) 2024.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