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승순

개신교와 가톨릭에 대하여 (1)

산승순 2024. 1. 16. 20:55

나는 여섯 살 때부터 성당에 다녔다. 그리고 아내는 나보다 더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우리 집안사람은 모두 가톨릭이고 아내 집안사람들은 모두 개신교를 다닌다. 아내는 개신교를 '다니는 것' 정도가 아니라 신학 석사를 공부했고, 오랫동안 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했다. 비종교인이나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은 전도사가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전도사는 신학대 학사, 석사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지 못한 경우 전도사가 된다. 특히 아내가 다니는 장로교는 여성 목사가 존재하지 않는 보수적인 교단이기 때문에 전도사가 아내가 할 수 있는 최종 직분이다. 우리가 연애를 시작할 때도 아내는 전도사였다. 나는 성당에 오랫동안 다닌 사람들 중에 성당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주변에 꽤 많은 편이지만 아내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대부분 교회나 학교 주변에 있는 개신교를 다니는 사람들이다. 연애 중에도 아내는 토요일과 일요일에 교회에서 일을 했다. 전도사는 교회에서 급여를 받는 직업의 일종이기도 하다. 가톨릭에는 직업인으로서의 종교인은 신부님과 수녀님, 수사님 정도지만 평신도의 참여가 교회의 근간이 되는 개신교는 제도가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평신도라도 오래 교회에 다니면 일정한 직책이 생기고, 장로님이 된다면 교회의 운영에 직접적인 영향을 행사하기도 한다. 신부님이 많은 것을 휘어잡고 전권을 휘두르는 가톨릭과는 많이 다르다. 교회의 목사님이 그만두시면 교회 신도가 직접적으로 차기 목사를 선출하는 경우도 있다. 성당이나 교회나 소속감이 중요하지만 교회는 그 소속감이 남다르다. 가톨릭 신자들보다 개신교 신자들이 자신이 교회를 구성하고 이루는 독립적이고도 특별한 존재라는 인식이 훨씬 더 크다. 반면 가톨릭은 '이 성당을 다니는 신자'라는 정도의 인식만이 있을 뿐, 성당에서 독립적이고도 주체적인 신도의 모습을 유지하는 경우는 상대적으로 적다.

 하지만 가톨릭 신자들은 성당이나 신부님의 행태가 적절하지 못하다고 느낄 때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내가 다니는 성당이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거나 자신이 성당을 이루는 주체라고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성당이나 신부님은 나와 신을 엮어주는 매개체에 가깝고, 신부님은 신의 대리자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래서 성당에 애정이 있지만 성당이 곧 나 자신이 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반면 교회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교회를 이룬다는 생각이 조금 더 강하기 때문에 한 번 교회에 다니면 그 교회에 애착을 갖고 오랫동안 다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교회 내에서 올바르지 않은 일이 생겨도 조용히 넘어가는 일은 성당보다는 교회가 더 많다고 생각한다. 목회자들과 신부님, 수녀님이 아닌 평신도의 경우라면 개신교가 성경을 훨씬 더 많이 읽고 성경 자체에 대한 앎도 더 뛰어나다. 가톨릭 미사는 일종의 제사이며, 일정한 형식을 갖춘 예식의 일종이기 때문에 주일에 예식에 참여한다는 생각이 더 강하다. 그래서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은 미사를 보며 신을 맞이하고 신과 개인적인 대화를 나눈다. 반면 개신교의 예배는 물론 예식의 일종이지만 성경 말씀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목사님이 알려주시는 성경 말씀과 그 해석을 듣기 위해 신도들이 모인다. 개신교의 주체는 '성경'외에는 있을 수 없고 성경에서 나오는 게 모든 행위의 근원이 된다. 하지만 가톨릭은 교황님이 선포하는 말씀이나 중앙에서 정하는 것에 따라 바뀐다. 그 근거는 성경뿐 아니라 회의를 통해서 정해진 것일 수도 있고, 특정한 교황님의 해석에 근거하기도 한다. 그래서 가톨릭은 중앙 집권적이고 통제된 획일성을 보여 표준화되어 있지만, 개신교는 성경의 해석에 따라 엄청나게 많이 갈라진다.

 이를 바꿔 말하면 교회는 자영업에 가깝기 때문에 교회 자체가 사람을 모집하고 홍보하고 기획하고, 운영해야 한다. 반면 성당은 브랜드명에 의지하기 때문에 운영에 그렇게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애초에 주임 신부님이 5년, 보좌 신부님이 2년 정도에 한 성당에 거주하기 때문에 한 사람의 운영 능력이 크게 영향을 발휘할 수 없는 구조적 특성이 있다. 다른 두 가지의 시스템은 각각의 장단점이 있다. 교회는 의도가 좋은 사람들이 모인다면 아주 좋은 영향력을 널리 펼칠 수 있지만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다거나, 목사님과 장로님들간의 적절한 균형이 무너진다면 교회가 어디까지 나락으로 갈지 알 수 없게 된다. 성당은 한 사람에 크게 흔들리지 않지만 그만큼 신자들 상호 간의 끈끈함이 교회보다 덜하고 주변에 신앙을 전파하는 데 크게 관심이 없다. 대부분이 자신의 개인적인 신앙을 토대로 공동체를 구성한다. 교회에 비하면 성당에 다니는 게 훨씬 편하고 정신적인 압박감도 덜하다. 성당 신자들은 모두가 죄인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용인하는 경향이 있고(?) 신자들끼리 서로의 신앙이 나쁜 방향으로 간다고 지적을 하거나 관심을 두지도 않는다. 반면 교회 신도들은 신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신에게 자신의 의탁하고, 때로 신에게서 흔들리는 사람이 있다면 각자 개인의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하여 지적을 하기도 한다. 이 부분은 때로는 장점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단점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좋은 경각심을 주는 행위는 때로 정말 필요하기도 하다.

 비신자나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이 보기에 개신교는 각각의 종파가 있지만 서로 존중하고 함께 가는 큰 틀에서의 한 가족으로 생각하는 하나의 집단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는 꽤 다르다. 아내는 장로교의 대학원에서 석사를 졸업하고 감리교의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다. 이렇게 문장으로 쓰면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건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전환을 하는 것만큼이나 특이한 이력이다. 장로교 안에서도 파가 여러 가지로 갈리는데 그것까지는 나도 잘 모른다. 다만 장로교의 큰 틀은 장 칼뱅의 신학을 따르는 노선을 취한 교회들이고 장로회를 통해 의사 결정을 하는 게 특징이다. 그리고 교리적으로는 인간의 의지가 신의 의지에 영향을 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신에게로의 무조건적인 찬양을 중요시한다. 장로교는 신에게 가장 충실한 근본주의적인 교단 성격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특징들 때문에 보수적인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 장로교는 십자고상, 성상, 고해성사 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개개의 교회 내 장로회가 중요하기 때문에 중앙적 체제가 노회와 총회의 형태로 약하게 존재하긴 하지만 연합력이 떨어진다. 반면 감리교는 성공회 사제 출신인 존 웨슬리의 신학을 따른다. 신의 의지와 함께 인간의 의지를 동시에 중요시한다. 웨슬리에 따르면 인간은 원죄로서 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신을 향해야 할 시선을 자신에게 돌린다. 따라서 인간은 신이 주시는 믿음을 통해 이를 회복해야만 하는 것이다. 간단하게 보면 장로교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회복될 수 없기 때문에 신이 택한 사람에게 은총이 주어진다고 보는 것이고, 감리교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선을 추구하는 마음이 그래도 남아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로 개선될 여지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장로교가 보는 감리교는 비신자들이나 가톨릭 신자들의 생각보다 더 따갑다. 그리고 제도적으로 감리교는 '감독회장'이 있고, 중앙의 체제를 따른다. 그 외의 교파들은 나도 잘 모른다. 다만 한국에서 흔히 생각하는 교회의 이미지를 결정하는 건 장로교이며, 감리교와 성공회, 루터교 등의 교단은 생각보다 더 제도와 규칙을 따르며 운영 체제도 표준화되어 있다.

 가톨릭의 교리는 상대적으로 복잡하다. 개신교의 시선으로 보는 성당은 교황이라는 인간이 '교황무류성'이라는 제도로 인해 작은 오류에서 벗어난다는 특징이 있다는 게 이해가 안 될게 분명하고, 성경에 나오지 않는 것들을 인간이 합의해 운영하는 것들이 납득이 안될 것이다. 로마 교회가 가지는 해석의 정당성은 오랜 신자인 내가 보기에도 때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다만 가톨릭에서의 성경이란 현시대를 살고 있는 '가톨릭교회'가 그 연장선에 있으며, 가톨릭교회의 해석이 성경에 있는 신비적 성사의 근거 그 자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톨릭은 열두 사도에서부터 이어지는 성전에 대한 신앙이 근거가 된다. 가톨릭의 구원론은 신의 은총과 인간의 믿음이다. 다만 가톨릭은 사랑의 행위를 믿음의 연장선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요시한다. 사랑의 실천이 결국 은총으로 가는 믿음을 만든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생각해 보면 개신교와 가톨릭이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개신교 안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해석의 주관을 두느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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